현업자를 위한 통계

📊 세고, 분류하고, 증명하다 — 통계가 과학으로 진화한 과정, 17세기 씨앗에서 19세기 개화까지

고물상인 2026. 5. 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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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날 당연하게 사용하는 통계학(Statistics)은 처음부터 독립된 학문이 아니었다. 통계학에는 크게 세 갈래의 뿌리가 있다. 하나는 사회현상을 세고 분류하려는 사회조사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17세기 도박·보험에서 출발한 확률론이며, 마지막 하나는 천문학의 측정오차를 다루는 수학적 전통이다. 이 세 흐름이 약 300년에 걸쳐 합류하면서 "숫자 세기"가 "과학적 분석 도구"로 진화했다. 그 여정을 세기별로 따라가 보자.


🌱 17세기 — "세어보자": 정치산술의 시대

  통계적 사고가 사회에 본격적으로 적용된 가장 이른 시점 중 하나는 1662년이다. 영국의 상인 존 그랜트(John Graunt, 1620–1674)가 런던의 주간·연간 출생·사망 기록인 "사망표(Bills of Mortality)"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Natural and Political Observations Made upon the Bills of Mortality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랜트는 근대 인구통계·사회통계 분야의 결정적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가 발견한 것들 — 약 14대 13의 비율로 남아 출생이 여아보다 많다는 관찰, 도시 사망률이 농촌보다 높다는 패턴, 질병별 사망 추이의 규칙성 — 은 "사회현상도 숫자로 분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사례였다. 이 업적으로 그랜트는 찰스 2세의 추천을 받아 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랜트의 동료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 1623–1687)는 "정치산술(Political Arithmetic)"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이를 "정부에 관한 것들을 수치로 추론하는 기술"이라 정의했다. 그의 대표작 Political Arithmetick(1690)은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의 경제력을 수치로 비교한 연구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통계는 "얼마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수준이었다. 도구는 단순 집계와 비율 계산이었고, 확률이론이나 수학적 모형과는 아직 본격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국가 운영을 위한 실용적 정보 수집이었지, 독립된 학문적 탐구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 18세기 — "분류하자": 두 흐름이 각각 발전하다

18세기에는 중요한 두 갈래의 발전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독일의 "Statistik" — 국가학 전통

1749년, 독일의 고트프리트 아헨발(Gottfried Achenwall)이 "Statistik"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이때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통계학이 아니었다. 국가(Staat)의 인구·군사력·자원·경제 등의 현황을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학문, 즉 "국가학(Staatswissenschaft)"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국정 보고서 작성에 가깝다. 프로이센의 성직자 쥐스밀히(Johann Peter Süssmilch, 1707–1767)는 이 전통 안에서 출생·사망·혼인 통계의 규칙성 속에서 "신의 질서(Die göttliche Ordnung)"를 읽으려는 시도를 했다.

수학의 확률이론 — 도박에서 천문학까지

  한편 확률이론은 17세기 파스칼(Pascal)과 페르마(Fermat)의 도박 문제 연구에서 출발하여, 베르누이(Bernoulli) 가문을 거쳐 18세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와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가 정규분포와 최소제곱법을 정립했는데, 이것은 주로 천체 관측의 측정 오차를 처리하기 위한 도구였다. 18세기의 이 두 흐름 — 사회를 기술하는 전통과 수학적 확률 도구 — 은 아직 충분히 통합되지 않은 상태였다. 부분적인 접점은 있었지만, 하나의 학문으로 합쳐지는 것은 다음 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 19세기 — "왜 그런가?": 흐름이 합류하고 학문이 형성되다

19세기에 일어난 결정적 변화는, 이전 세기까지 따로 발전하던 흐름들이 마침내 합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케틀레 — 사회물리학의 등장

  벨기에의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 1796–1874)가 이 합류의 주역이다. 원래 천문학자였던 케틀레는, 천문학에서 쓰던 정규분포와 확률이론을 사회현상에 적용했다. 범죄율, 자살률, 결혼율, 심지어 신체 치수에서까지 통계적 규칙성을 발견한 그는 이를 "사회물리학(physique sociale)"이라 불렀고, "평균인(l'homme moyen)"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그의 대표작 Sur l'homme et le développement de ses facultés: Essai de physique sociale(1835)는 확률과 통계를 사회현상에 체계적으로 적용한 중대한 선구적 저작으로 평가된다. 다만 오늘날 말하는 수리통계학의 핵심 틀 — 가설검정, 추정이론, 실험설계 등 — 은 이후 피어슨, 고셋, 피셔, 네이만 등의 작업을 통해 완성된다는 점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콩트 vs 케틀레 — "사회학"이라는 이름의 탄생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는 사회를 자연과학처럼 연구해야 한다는 실증주의(Positivism) 철학을 주창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학문을 "사회물리학"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케틀레가 같은 용어를 통계적 데이터 수집과 정규분포 분석이라는, 콩트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사용했다. 콩트가 추구한 것은 사회를 지배하는 추상적 법칙의 이론적 탐구였기 때문이다. 이 용어 충돌과 방법론적 차이 속에서, 콩트는 1838년에 라틴어 socius(동료)와 그리스어 logos(학문)를 합성하여 "사회학(sociologie)"이라는 새 용어를 채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사회학은 정규분포와 통계적 방법론을 중시하는 케틀레의 비전에 더 가깝게 발전했다.

 

 참고로, "사회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콩트 이전에 시에예스(Emmanuel-Joseph Sieyès)가 1780년 미출간 원고에서 먼저 사용한 흔적이 있다는 점도 학계에서 종종 언급된다. 다만 이 용어를 체계적 학문의 이름으로 정착시킨 것은 콩트의 공이다.

뒤르켐 — 통계적 사회학의 완성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1858–1917)은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과 케틀레의 통계적 방법론을 통합한 인물이다. 1895년 보르도 대학에서 사회학을 제도화하고 프랑스 최초의 사회학 교수직을 맡았으며, 같은 해에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을 출간하여 "사회적 사실(faits sociaux)을 사물처럼 객관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의 대표작 Le Suicide(자살론, 1897)는 통계학과 사회과학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저작이다. 뒤르켐은 유럽 각국의 자살 통계를 체계적으로 수집·분석하여, 종교·혼인 여부·경제 조건 같은 사회적 변수와 자살률의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자살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조차 사회적 패턴을 보인다면, 그 원인은 개인 심리가 아니라 사회 구조에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증이었다.

Le Suicide는 사회 조사에서 통계적 방법을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현대적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 그러면 그랜트가 통계학을 확립한 시초인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이 있다. 1662년에 사회현상을 수치 분석한 그랜트가 곧 통계학을 학문으로 확립한 시초라고 봐도 될까?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 "시초"와 "확립"은 구분해야 한다. 학문(discipline)이 성립하려면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재현 가능한 방법론. 그랜트는 비율 계산과 비교라는 단순한 도구를 사용했을 뿐, "이런 절차를 따르면 누구든 같은 분석을 할 수 있다"는 방법론적 체계를 남기지는 못했다. 방법론의 체계화는 19세기 케틀레를 거쳐, 20세기 피어슨·고셋·피셔·네이만 등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이론적 틀. 그랜트는 패턴을 발견했지만, "왜 이 패턴이 나타나는가?"라는 이론적 설명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케틀레의 "평균인" 개념, 뒤르켐의 "사회적 사실" 이론이 이 부분에 해당한다.

 

제도적 기반. 학과, 학회, 학술지가 있어야 한다. 런던통계학회(현 왕립통계학회)가 설립된 것이 1834년, UCL에 세계 최초의 대학 통계학과가 만들어진 것이 1911년(칼 피어슨)이다. 그랜트의 본업은 포목상(haberdasher)이었다.

 

후속 연구자 집단. 그랜트의 작업은 당대에 큰 주목을 받았지만, 정치산술 전통은 18세기에 한동안 쇠퇴했다가 19세기에 다른 형태로 부활한다.

 

  비유를 들자면, 그랜트는 낯선 외국 땅에서 처음으로 의미 있는 문장을 말해본 사람이다. 그 전까지 그 언어로 체계적인 대화를 시도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 분명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문법책, 사전, 어학당의 설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문법의 뼈대를 세운 것은 케틀레이고, 이를 엄밀한 교과서 체계로 발전시킨 것은 피어슨·고셋·피셔·네이만 등 20세기 통계학자들이다. "근대 사회통계의 결정적 선구자"라고 하면 정확하고, "통계학을 학문으로 확립한 시초"라고 하면 과대평가가 된다. 가장 적절한 표현은 "통계학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다.


📌 세 세기의 핵심 차이 — 한눈에 보기

시기 핵심 질문 도구 목적 대표 인물

17세기 "얼마나 있는가?" 집계, 비율 국가 운영 정보 그랜트, 페티
18세기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체계적 기술 + 확률이론(아직 미통합) 국가 현황 보고 + 측정 오차 처리 아헨발, 라플라스, 가우스
19세기 "왜 그런가?" 확률·정규분포의 사회 적용 사회 법칙 발견·이론 검증 케틀레, 콩트, 뒤르켐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흐름은 집계 → 분류 → 인과 추론으로의 진화다. 이것이 통계학이 단순한 숫자 세기에서 독립된 학문으로 성장한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조사 전통은 가장 중요한 모태 중 하나였지만, 확률론과 측정오차 이론이라는 수학적 줄기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통계학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 참고문헌

  • Graunt, J. (1662). Natural and Political Observations Made upon the Bills of Mortality. London: Tho. Roycroft.
  • Petty, W. (1690). Political Arithmetick. London: Robert Clavel.
  • Quetelet, A. (1835). Sur l'homme et le développement de ses facultés, ou Essai de physique sociale. Paris: Bachelier.
  • Comte, A. (1830–1842).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 Paris.
  • Durkheim, É. (1897). Le Suicide: Étude de sociologie. Paris: Félix Alcan.
  • Porter, T.M. (1986). The Rise of Statistical Thinking, 1820–1900. Princeton University Press.
  • Goldman, L. (2022). Victorians and Numbers: Statistics and Society in Nineteenth Century Britain. Oxford University Press.
  • Fisher, R.A. (1925). Statistical Methods for Research Workers. Edinburgh: Oliver & Boyd.
  • Hacking, I. (1990). The Taming of Cha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 Stigler, S.M. (1986). The History of Statistics: The Measurement of Uncertainty before 1900.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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